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몇 가지 스킬이 있으면 더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킬을 안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영문법을 다 안다고 영어회화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준비가 되면 들립니다. 사무엘이 처음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들려주셨습니다. 반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들려주셔도 못 듣습니다. 오늘은 그 네 가지 준비를 나누겠습니다.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순종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자세가 된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않으십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들은 오히려 그 음성을 전한 선지자를 비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순종은 마음의 자세에서 시작합니다. 어떠한 말씀을 하시더라도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준비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학점과 진로와 계획이 유지되는 수준에서만 순종하겠다고 선을 그으면,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상을 요구하시면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이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마저 순종할 자세가 된 사람만이 순종합니다. 그 정도까지 헌신할 마음이 없으면 듣자마자 사단의 음성이라 치부해 버립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사사기 시대 사람들처럼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밖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말씀과 상관없이 행한 것에 대한 천국의 보상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불법은 헬라어로 아노미아, 곧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켜 행할 법을 주었음에도 준 적 없는 것처럼 사는 자들아, 내가 너를 알지 못하니 떠나가라 하시는 것입니다. 음성을 듣는 삶은 선택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무조건 들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이 땅의 결과를 바라보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과정 그 자체를 위해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내 편에서 순종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 드립니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이 땅의 것을 위해 순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따지는 순간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내 판단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순종은 그 말을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에게 권위를 주신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형제들에게 이것은 가정을 지키는 필수 조건입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복종하듯 늘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지하며 사셔야 합니다. 그것 없이 제왕적 권력을 누린다면 수년 안에 아내와 자녀가 외면할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성경 최초의 제사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라 가인까지 받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했다면 자기를 돌아보았겠지만 그는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고 결국 시기심으로 아우를 쳐 죽였습니다.
시기심은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죄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심은 향락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레위기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흠 없는 제물과 안수입니다. 안수할 때 나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고 동시에 제물의 흠 없음이 나에게 전가됩니다. 흠 없는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원래 내가 당했어야 할 것인데, 믿음으로 예수님께 전가시키고 대신 그분의 의로우심을 전가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나만 압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은 두 제사의 겉모습에 아무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예배 직전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즐기다가 똑같은 호흡으로 찬양한다면 진정성이 있겠습니까.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가인의 삶이 문제였습니다.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정한 상태로 나아갈 때 멸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예물을 드리려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화목하고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음성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내 삶이 예배자의 삶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아직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분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답은 회개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막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지 않습니다. 막힌 담이 있다면 허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창세기 22장에서 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그 음성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합니까. 오히려 인신공양을 요구하던 몰렉에 가깝습니다. 이번 주 예배를 전통 제사상으로 차리라는 음성이 들렸다면 우리는 당장 사단의 음성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것을 정확히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했습니다. 이유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의 본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 1 | 약속 —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하신 그 약속을 지키실 것 |
| 2 | 성품 — 거짓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심 |
| 3 | 능력 — 백 세에 아들을 주신 분이라면 다시 살리실 능력도 있으심 |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분별했습니다. 믿음이 클수록 분별의 폭이 커집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약속의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비웃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도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지 못했고, 기도하며 애쓰던 중이 아니라 자고 있을 때 처음 들었습니다. 음성은 애써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 들립니다. 친구를 사귈 때에도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 하나님도 동일한 인격체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그는 이미 하나님과 사십 년 이상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음성과 감동과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그토록 엽기적으로 들리는 음성 앞에서도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삼 일 길을 걷는 동안 사단이 별의별 생각으로 공격했겠지만, 사십 년의 믿음과 친밀함이 그를 모리아 땅까지 이끌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와서 급하니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진짜 어머니인지 보이스피싱인지 분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와 친밀하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평소 말투, 성격, 오늘의 일정, 최근의 형편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음성을 듣는 것은 쉽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분별하는 과정은 어렵습니다. 이것 역시 친밀감을 통해 분별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기질, 평소 나에게 말씀하시는 통로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일은 없습니다. 예배자의 삶, 동행하는 삶이 있어야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설사 듣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평소에 들었던 그 말씀, 그 통로, 그 채널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의 상한선을 긋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잠재력에 선을 긋는 것이고, 여러분을 향한 무한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선을 긋는 것입니다. 다 내어드리십시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